영화의 장점이 오히려 단점이 되었다.

뛰어난 기술력을 통해 실사화를 하였고 다큐를 보는듯한 동물들의 모습을 보았다.
정말 놀라운 기술이지만 이 점이 오히려 관객의 마음을 가로막았다.

즐거운 분위기에도 표정의 변화는 적으며, 슬픈 분위기에서도 싸우는 분위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원작 애니메이션과 달리 표정 없는 등장인물들에게 감정 이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물론 노래도 좋고 내용도 정석이지만 담백하여 좋았다.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다.
그러나 다큐에 억지로 더빙한 듯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실사판 라이온킹은 갈피를 못잡은 영화이다.

뮤지컬 영화가 되든가 극화가 되든가 둘 중 하나를 했어야 했다.
Be Prepared는 짧은데다 아무런 임팩트가 없다.

멋진 노래도, 극화도 없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현실적으로 라이언킹을 설명하고자 한다.
혁명가 스카의 몰락을 다룬 영화이다.
사자의 먹잇감들이 와서 심바의 탄생을 기뻐하고 절을 한다.

상식적으로 사자의 인구수 증가 -> 더 많은 먹잇감 필요 -> 더 많이 잡아먹힘 이므로 심바가 태어난 순간 ‘아 쉬펄 x됐네’를 외쳤어야 한다. 착한 사자는 죽은 사자 뿐이다. 노예근성이 따로 없다.
심바는 혈통만 믿고 날뛰는 철부지이다. 반면 머리도 좋고 노력 하지만 혈통에 밀려 왕이 못된 삼촌 스카는 뒷구석에 밀려나있다. 역사적으로도 혈통 믿고 날뛰는 놈들은 그 끝이 안좋았다.

심바가 하는 꼴을 보면 무파사가 자식 교육을 개판쳤구나 라는게 느껴진다. 실제로도 교육이 개판이다. 무파사가 얘기해는 circle of life론. 초식동물을 사자가 먹고 사자가 죽어 풀에 먹히는 순환을 따른다? 영화 내에서 사자가 한 10마리 정도, 사자에게 뜯어먹혀 죽고 풀에 먹히는 초식동물이 압도적으로 많다.

왕정과 신분제를 공고히 하는 세뇌교육인 것이다. 

 

 

스카는 혁명 이념이 있다.

하이에나와의 공존을 꾀한 것이다.

사자들한테 먹이를 털리며 탄압받는 동물.

귀족인 사자들에게 핍박받고 수탈당하는 자들이다.

핍박당하고 수탈당하는 하이에나들과 공존하며 다시는 굶지 않겠다는 이상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


왕위에 오르고 동료들인 하이에나와의 공존을 추구한다.

아니나 다를까 귀족세력이자 적폐들인 사자들 표정이 띠껍다.

역사적으로 왕위를 찬탈하고 나서 왕권 강화를 위해 귀족들을 한번씩 갈아주는게 필요하다.

이방원처럼 다 죽였어야했다.

 

 

 


그동안 심바는 뭘 했냐 하면 티몬과 품바라는 히피들 만나서 벌레나 빨고 앉아 있었다.

이 벌레나 먹던 무능한 심바가 갑자기 자신이 왕이 되겠다며 프라이드 랜드로 돌아온다.
스카의 개혁이 마음에 안들었던 귀족들 입장에서 대립왕이 등장했으니 강력 푸시를 할 수 밖에 없다. 

 

전체적으로 구시대적인 신분제, 왕권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서 마치 스카가 악역처럼 표현이 된다. 

물론 원작이 그러니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정말 시대에 맞게 영화를 본다면 스카는 오히려 영웅이 아닐까.

절대적인 신분제와 왕권이라는 지배질서를 무너뜨린 사자가 아닌가. 물론 본인도 결국 왕의 자리에서 이렇다할 성과를 못내고 몰락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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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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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의 아이, 일본 특유의 장인 정신이 장면마다 묻어나왔다. 벽과 바닥에 보이는 작은 균열과 빗방울의 모습부터 디테일이 감탄스러웠다. 이렇게 멋진 장면이 연속되어 나오다가 중간 불꽃놀이에서 장면의 품질이 갑자기 3d 건축 모형 느낌이라서 당황스러웠다.

감독은 비청소년에대한 반감이 있는 것 같다. 가출 청소년, 청소년 가장, 사회 소외 계층인 아이들이 주인공이다. 사회는 항상 어떤 판타지적 재난 요소로 불운과 부정에 시달리며 세상을 유지하고 있다. 너의 이름은 영화에서 운석으로 표현됬고 날씨의 아이에선  폭우로 표현되었다.  

 

와동시에 그 모든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몫은 주인공에게 내맡겨진다. 주인공들은 언제나 소외되고 연약한 청소년이다. 고대 문명에서 인간 제물이란 희생을 통해 미래에대한 희망을 그려왔다. 문명마다 제물의 대상이 다르긴 했으나 가장 강인하고 뛰어난 사람이거나 힘이 없는 여자와 아이가 주를 이루었다. 희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책임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회가 만든 문제와 현실을 특정 인물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다. 난폭한 날씨 속에서 위험한 도시, 총기가 떠돌아다니는 도시, 부모가 없이 열심히 일하며 동생을 보살피기 위해 맥도날드부터 사창가까지 갈 현실을 마주한 주인공, 시골에서 꿈과 소망을 찾아서 도쿄에 왔으나 미성년자라는 제약에 일할 곳도 없고 받아주는 곳도 없는 주인공은 월급 3000엔에 일을 한다. 주인공은 그저 잘살길 바랬고 자신의 능력을 통해서 일순간이지만 사람들의 고충을 해결해주었다.

 

매 번 자신의 생명을 깍아서 말이다. 말로에는 모든 생명을 바쳐야 모두가 구원 받는다는 식의 희생이 강요되었다. 책임 없는 자가 책임 지게 생긴 것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말을 믿어주지 않고 계속 통제하려고 든다. 식사, 주거비, 교통비, 통신비를 내주니 3000엔만 주어도 괜찮다는 식이다. 아이의 의사를 묻지않고 반강제로 아동보호소에 보내버리는 식이다.

 

결말부에는 자신이 호다카의 뺨을 때리고 복부에 발길질을 하는 아동학대를 해놓고 경찰이 호다카를 폭행하자 네가 감히? 발끈하며 경찰을 막는다. 아이를 일종의 소유물로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 호다카가 히나에게 이제 날씨의 무녀가 아니라고 소리치는 모습은 마치 네 책임이 아니라고 울부짓는 모습을 연상 받았다.

 

 

 

결말에 이르러서 재난적 요소가 해결될 것이라 예상했으나 틀렸다. 재난의 책임은 현재까지 살아온 어른의 책임이기에 아이에게 희생과 책임을 강요해선 안된다는 감독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예상해본다. 감독은 일본의 근현대사를 부정하는 것 같다.

 

일본의 전체주의 위주의 근현대사는 개인들에게 책임을 강요하고 전체를 위한 희생을 요구했다.

그 과정 속에서 결국 가장 약한 개인들에게 고스란히 가장 많은 희생의 몫이 돌아간다.

목숨으로 책임지고 권리는 보장받지 못하는 암울한 사회이다.

 

다른 나라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아서 더 씁쓸한 영화이다.

책임지지 못하는 사회. 불안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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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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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영화를 보았다. 최근 페미니즘 관련 책을 읽어서일까. 디테일이 보였다. 남아선호사상, 남아는 로봇 장난감, 여아는 분홍색 공주님 옷, 시집이 인생의 목표가 되버린 여자, 임신과 출산의 한계, 제도가 있으나 정착하지 못한 문화, 오빠와 남동생을 위해 희생 당한 여자들의 인생, 미행하는 남고생과 무서웠던 여학생, 그러나 여학생이 웃어주고 헤프다는 네 탓이라는 책임부여.

가부장제란 원래 이런 것이 아니다. 한국의 가부장제는 쓰레기나 다름없다. 미국의 가부장은 적이 농장에 쳐들어오면 가족을 피신시키고 총을 들고 나가서 싸운다면, 한국의 남성은 딸들은 총알받이 시키더라도 본인과 아들은 도망치는 모습이다. 가부장이 더 많은 권력을 소유하는 것은 더 많은 책임과 고생을 떠맡기 때문이다. 그것은 적어도 인간의 도리가 있었다.

한국 사회는 심각했다. 5.18이 큰 상처를 주었듯이 6.25는 더 큰 상처를 주었다. 속도는 빠르고 상처는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채 흉터가 잔뜩 생겨버렸다. 좋은 사람들은 살아남지 못했고 부도덕하고 이기적인 자들이 살아남았다. 그들을 처벌하지도 못했다. 분노와 슬픔이 가득하다.

영화에서 참좋았던 것은 공유를 극단적인 한남충으로 안만들었다는 것이다.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주고 싶어하고, 아내를 위해서 시선을 이기고 육아 휴직을 쓰겠다고하고, 아내가 아픈 것을 알고 전전긍긍하며 자신의 탓인가 슬퍼한다. 배운대로 행동하는 남자인 동시에 본인의 입장에서 나름대로 노력하려는 남자로 연출했다. 이로써 구조적인 문제를 나타낸다.

 

 

임신과 출산에 대한 존중이 부족한 사회, 이런 사회에서 아이를 왜 낳겠는가? 육아 휴직이 있어도 그것에 대한 존중과 배려도 없고 문화가 정착하지 못했다. 이러니 안정된 생활을 위해 공무원으로 인력이 몰린다. 그 상황에서 군가산점을 주려고하니 생존권의 문제가 되버리는 것이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다 떠나서 내가 먹고 살기위해서 상대방을 깍아내려야하는 구조.. 유년기부터 지속적으로 교육된 성 고정관념도 팽배하다. 

 

추상적인 이야기도 아니고, 가상의 인물도 아니고, 용기를 잃고 흑화해버리는 인물도 아니었다. 그들은 꾿꾿히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우리의 이웃이고 가족이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이야기이다. 현실이나 다름없었기에 더 마음이 아팠다. 이 정도 영화도 욕을 먹을 정도라면 얼마나 심적으로 위태로운 상태인가 염려스럽다.

 

현재 20-30대 남성이 가진 것도 없는 상태에서 잘못걸리면 나도 빨간줄 그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은 이해가 된다.

그렇다고 실존하는 문제를 왜곡하고 비난하는 것은 잘못됬다. 동시에 증오로만 가득찬 레디컬 페미니스트도 사라져야한다. 여성 인권 증진이 아니라 시사 정치 피로감만 증발 시키는 그들의 행보는 비난 받아 마땅하다.

영화 리뷰하는 채널들이 리뷰는 하고싶고 패미니즘 지지한다고 욕 먹을까봐 걱정이고 고민인 상황이다.
어떤 채널은 서론에서 페미니즘을 엄청 까내린 뒤에 그래도 영화는 괜찮은 편이었다고 말한다.
어떤 채널은 신중한 단어와 문장으로 자신의 솔직한 평가를 말한다.

문제는 수준 낮은 분노로 가득찬 바보들이 욕만 싸지르고 다닌다. 대화가 아닌 비난과 야유를 퍼부으려는 사람들, 욕할 대상이 필요하고 탓할 대상이 필요한 사람들, 진짜 문제에는 분노할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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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기대를 안하고 감상한 영화이다.

감상 후 왜 이런 작품을 안봤나 탄식이 나왔다.

단순한 우주를 배경으로한 SF 영화가 아니었다.

 

우주라는 배경을 영화의 세계관으로 놓고, 인간의 삶을 은유적으로 풀어낸 명작이었다.

위대한 휴머니즘이 마음을 뭉클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보편적이고 스토리는 뻔하거나 전형적이라 지루한 느낌이 강하다. 

스트레오 타입의 식상한 영화, 정석을 따라간 영화와 명작의 차이를 찾은 기분이다.
정석대로 만들어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담아낸 영화이다.

식상하기보단 담백하고 뻔하다기보단 단단하고 느낌이었다.

딱 필요한만큼만 말한 영상이었다.

 

단 두 명의 중점적인 인물밖에 안나오는데.

인간의 생애를 다룬 휴머니즘과 동시에 우주를 다룬 영상미의 조화는 아름다웠다.

일순간 숨을 멈추고 집중해서 보다가 깊이 심호흡하고 다시 보길 반복하게 만들었다. 

 

 

 

한 인간이 무력한 상황에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이겨나가는 모습이, 결국 지구에 안착해서 두 발로 서서 걸어가는 그 과정이 너무 아름다웠다.  유한한 인간이란 존재가 어떤 고통 속에서 한계를 돌파하고 성장하며 이기고 발전했는지 말하는 영화였다. 

 

다만, 흥행성이 짙은 킬링타임용 영화를 기대하고 이 영화를 본다면 실망할 것이다.

그런 종류의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지루하고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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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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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나와 같은 이름을 쓰는 사람이 한국에 몇 명이나 존재할까 궁금했다.

검색을 하다가 이 사이트를 발견했고 꽤나 재미있는 사이트였다.

전자가족관계시스템에서 데이터를 받아서 운영되는 사이트이다.

단, 2008년 이후 출생자 정보만 보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2008년 이후 출생자만 검색할 수 있으며 그 이전은 불가능하다.

다른 방법을 아시는 분은 댓글로 남겨주시길. 

 

가장 많이 쓰는 이름, 유일한 이름, 성씨별 통계 등 다양한 것들이 있었다.

 

설마 있을까하며 검색해보았던 단어가 있다.

과거에 개명 신청자 중에 이기씨와 운지씨가 기억났다.

 

 

검색 결과 이기는 2명, 운지는 29명이 있다. 2008년 이후 출생인 아이에게 부모가 이름을 이렇게 작명해주었다는 것은 아동학대, 가정 폭력에 포함이 되는 것 아닌가 의문이 들었다.  

 

최대 14자까지 검색이 가능하다.

 

성씨별 통계이다.

 

 

 

 

 

 

 

 

 

 

https://koreanname.me/

 

한국인의 이름 통계

한국인의 이름 통계 서비스

koreanname.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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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엑시트

감독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하는 뜻은 무엇인가?
그 의도는 온전히 표현되어 관객에게 전달되었는가?
그것을 보았을 때 나는 엑시트란 영화가 참괜찮은 작품이었다.
대명작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현사회를 풍자적으로 담백하게 풀어낸 수작이다.

이 영화는 현실적인 재난영화가 아니라 사회풍자적인 판타지성 재난 영화이다.
몇 몇 사람은 감독의 의도를 잘못 파악하고 현실성과 개연성을 따지고 있다.
영화라는 특성상 의도적인 개연성 파괴를 통한 유머와 우연적인 진행은 용납이된다.
물론 완전히 파괴된 개연성은 용납이 안되나 엑시트가 그 정도는 아니었다.

영화의 주제는 대한민국 청년의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초중고대학교를 다니고 사회에 나와도 공부한만큼의 능력도 없고, 단순히 고착화된 사회적 진급 문화에 불과하다. 정말 쓸모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현재 문화가 그렇기에 울며 겨자먹기로 대학에 가는 경우가 비일비제하다. 문제는 대학에가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이다. 졸업 후 취업이 녹록치 않다. 졸업 후 학자금 대출이 쌓인다. sky와 서울권 일부 대학을 제외한 대학은 나와도 양질의 일자리를 얻기 힘들다.

누군가는 말한다. 중소기업이 차고넘치고 공장이나 노가다판 가면 젊은 사람들이 힘든 일 안하려고해서 외국인노동자가 판을 친다고 말이다. 젊은 이들이 일자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힘든 일 하기 싫어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 말을 들으면 대가리 안에 뇌가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 초중고대학교만 나와도 12~16년의 세월을 공부만한 셈이다. 그러한 교육 과정을 밟은 인간이 육체 노동에 매몰되어 일평생을 살고 싶을까? 복지도 취업도 불안정한 중소기업에 단순한 일을 하며 살고 싶은 이가 있을까? 공장과 노가다판이나 단순업무에 갈 작정이었다면 10년이 넘는 교육이 필요없다. 대부분의 업무가 중학생에게 가르쳐도 업무가 가능할 정도이다. 과연 가고 싶을까?

그렇게 젊은이들에게 가르친 것은 공부하는 것 밖에 없으니 다양한 공무원 준비에 다시 뛰어든다.
그래도 안정적이고 할 줄 아는 것은 공부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런 교육과정을 만들고 젊은 이들을 몰아넣은 것은 누구인가? 그러한 사회적 책임은 누가 짊어지고 있는가? 사회구조를 만든 이들은 책임을 안지고 책임은 오로지 젊은이들에게 짊어지게한다. 영화는 그런 의도를 계속 내비췄다.

동아리 하나마저도 취업에 도움되는 것을 했어야했다고 자기탓하고 한탄하고, 지진보다 우리 현실이 재난이라는 선배의 하소연, 구름정원 상속받은 청년은 무책임한 모습을 보이고 상대적 약자에게 책임을 계속 전가하려한다. 영화내내 책임의 요소가 청년 주인공인 용남과 의주에게 전가된다. 그렇게 유대감이 깊어보이던 가족은 슬퍼하며 먼저 떠나가고, 구름 정원 점장은 계속 남에게 위험한 일을 시키고 자신은 탈출했고, 그렇게 홀로서기를 해야하는 두 사람의 청년에게는 안전 장비마저 너무 부족했다. 그래서 그들은 분필을 깨부수고 손에 바르고 밧줄을 구하고 쓰레기봉지와 테이프로 직접 방면복을 만들었으며, 사용시간이 10분 밖에 안되는 짧은 정화통을 찾아서 헤맨다.

책임은 전부 청년에게 짊어지게 했으나 청년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은 너무나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대학교 학자금에 빚부터 지고 사회에 나오는 청년(물론 부채 문제는 현사회의 고질적 문제이다. 청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부채를 가지고 살아간다.), 모든 책임은 개인에게 있다는 듯한 각자도생의 문화 속에서 청년은 발붙일 곳이 없이 영화 내내 살아남기 위해 구름정원보다도 높은 곳을 향해 목숨을 걸고 뛰어야했다. 멈추면 죽고 실수해도 죽고 헬기(사회적 도움)는 계속 안보이거나 최약자를 위해 양보한다. 구름정원을 떠나 도심 한가운데 높게 솟아있는 타워크레인 까지 가는 것은 이 사회가 아무것도 없는 청년에게 살아남고 싶으면 구름보다 높은 곳까지 목숨 걸고 오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그런 이들의 모습을 드론으로 게임 영상 보듯이 보는 대중의 모습과 마음이 찟어지면서도 할 수 있는 것이 내 아들과 딸에게 해줄수 없는 것이 현실인 부모의 모습이 대조된다. 또한 중간에 용남과 의주는 구출될 수 있었지만 사회적 약자인 청년보다도 더 최약자인 이들을 발견한다. 그들은 또 눈물을 글썽이며 책임을 떠안는다. 최약자는 바로 학원에 감금되있는 청소년이었다. 자신들의 과거였고 청년보다 더 불쌍한 모습이었다. 이들에게 자유는 없으며 겉모습은 학원인 감옥에서 감금 당한채 바닥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죽음을 구경할 수 밖에 없었다. 누가 이들을 감금했는가? 누가 이들의 자유를 빼앗고 죽음으로 내몰았는가? 아이들은 우리의 미래라며 아이들에게 한 짓을 보라.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에서 이들을 구한 것마저 가진 것 하나 없이 취업준비생인 용남과 가진 것 없어서 거지같은 직장 생활하는 알바와 별 차이가 없는 직장에서 근무하며 점장의 부조리를 참아야하는 의주였다. 보호 받아야할 이들이 보호를 해주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너무 마음이 아팠다.

재난을 안개로 표현한 것이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초반에 엉성한 CG에 당황했으나 저예산 영화에서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 아니었을까. 정체를 알 수 없는 안개같은 위험이 아래서부터 점점 위로 올라오고, 높은 곳에 있는 이들이 가장 빨리 구출 받을 수 있는 사회적 현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암담한 문화가 무엇이라 형언할 수 없는 통합적인 사회적 문제를 잘표현한 것 같다.

용남과 의주가 암벽등반 동아리만 다녔는데 어떻게 전문가도 못하는 등반을 하냐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목숨걸고 계속 위로만 올라가야한다는 청년의 현실을 말하는 영화의 의도가 중요한 것이다. 저렇게 얇은 밧줄로 암벽등반이 가능한가 그것이 중요한가? 그렇게 얇은 밧줄에 목숨줄이 걸려있는 청년의 현실을 말하고자하는것이 아닐까? 어느 정도의 개연성은 필요하나 영화 특성상 현실 고증이 완벽해야한다는 주장은 개소리이다. 그러면 다큐멘터리를 봐야지.

한 편으로 용남이 저 정도 실력으로 클라이밍 코치로 취업을 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다. 또 아쉬운 점으로 영화 결말에 사랑을 찾아서 둘이 연결되는 것도 좋으나 오히려 이들이 살아갈 앞 날이 그려지니 애석해보였다. 차라리 두 사람이 클라이밍 연습장을 열고 재난에서 살아남은 암벽등반가 코치. 이런식으로 취업해서 살아갔다면 어떨까. 물론 그것도 자영업의 힘든 점이 있으나 가진 것없는 청년의 모습보단 그나마 더 희망적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영화 내내 현사회가 청년에게 짊어지게한 모순적인 책임에 대해 그려졌다.
요새 젊은 이들은 패기가 없다. 나 때는 말이야~
가진 게 없는데 어떻게 패기가 있나. 너 때는 경제성장률이 높았고 몇 년마다 경제규모가 2배 3배로 커진 시기이다. 파이가 커질 때조차 파이를 못챙긴 멍청한 머리로 청년의 현실을 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현재의 청년 세대의 미래는 줄어드는 인구와 고령화 사회로 책임은 계속 늘어나고 통상적인 직장 생활을 통해선 희망도 안보이는 부동산 가격과 홀로서기가 불가능한 사회에서 홀로서기를 강요받는 현실이다. 점점 모든 것에 있어서 회의적이고 냉소적으로 변하게되는 것 같다.

환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의지가 중요하다는 말이 있으나. 의지가 있다고 현실적인 요소를 무시할 순 없다. 모든 이가 되고 싶었던 어른이 될 수는 없다. 열매 맺지 못하는 꽃이라고 다 죽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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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개봉일 : 19.06.28

관람일 : 19.07.02, 07.06

상영관 : CGV 광주터미널 SCREEN X, IMAX 3D

 

 

감상평

영화를 보는 내내 이것이 명작이란 생각은 점점 멀어졌다.

물론 그렇다고 졸작이란 것도 아니며 그저 시간 죽이기용 영화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영화를 보는 관람객의 입장에 따라 영화가 너무나 다르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1. 마블 시리즈 팬 2. 스파이더맨 팬 3. 신규 관람객

크게 나누자면 이렇게 나눌 수 있다.

 

문제는 마블 팬에게는 배경과 등장 인물에대한 설명이 없어도 자연스럽게 내용을 이해하고 즐겁게 관람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신규 관람객 입장에서는 어떨까? 아이언맨이 누구이며, 해피 호건은 스파이더맨과 왜 가까우며, 왜 닉퓨리에게 쩔쩔매는지 설명이 전혀 없기에 신규 관람객 입장에서는 깊이 빠져들기가 어렵다. 물론 마블민국에서 영화 내용을 모르는 사람이 아무리 없다고 하지만 설명이 너무 부족한 것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스파이더맨이란 영웅의 영화로 독립하지 못했다.

 

마블 시리즈이지만 시리즈의 배경 없이 내용 전개조차 이해하기 힘든 영화가 친절한 영화란 생각은 안든다.

어차피 마블 팬 많으니까 다 이해할 것이며 궁금하면 찾아서 다른 영화도 볼 것이란 생각일까.

또한 나는 마블 팬이기보다 스파이더맨 팬에 더 가깝다.

물론 그렇다고 덕질을 하는 정도는 아니다.

 

문제는 영화 제목이 스파이더맨이나 오리지널 스파이더맨이 불행의 상징인 것과 특유의 도심 거미줄 이동 장면이 없었다는 점이 아쉬웠다.

마블은 소니와 스파이더맨 판권을 가지고 마블만의 스파이더맨을 만들기위해서 아이언맨을 막 엮는 것 같지만 스파이더맨 팬이 보기엔 실망스러운 영화일 것이다.

 

물론 마블 시리즈를 놓고 보았을때 페이즈 3를 안정적으로 마무리한 느낌은 있다.

이렇듯 관람객의 입장에 따라서 영화가 너무 달라진다.

 

 

호평

액션 장면에서 확실히 화려한 효과에 눈이 확실히 즐거웠다.

3D안경이 불편했으나 효과만큼은 액션 장면에서 빛이 났고 물이 일렁이는 모습이나 현대의 과학기술인 홀로그램으로 빌런이 만든 빌런들이 소동을 일으키는 모습이 영화가 비판하고자하는 부분과 잘맞아 떨어졌다.

 

자신들을 영웅이 구해주기 바라는 대중의 성질(노예 정신, 몰주체성)

기술의 발전과 반대로 어리석어지는 대중

상징과 믿을 것이 필요하다고 비판하는 부분, 화면 속거짓과 진실의 모호한 경계

고도의 기술로 하는 일이 스트리밍, 문자보내기, 도촬(파커가 여자와있던 모습)에 불과한모습

스마트한 시대의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과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도움안되는 기술

영화 전반적으로 비판하고자하는 내용이었다.

 

피터 찌리릿(스파이더 센스)에 대한 설명도 좋았다.

영웅으로, 소년으로, 인간으로써 성장하는 모습을 그려주었다.

영화 초반 총알은 피하지만 바나나는 못피하냐는 메이 숙모의 핀잔

영화 중반 홀로그램 기술에 속절없이 유린 당하는 스파이더맨의 모습

영화 결말에 정신적 성장으로 완전해지는 스파이더 센스

 

아이언맨이 무덤에서 좀비로 일어나는 모습은 파커가 가진 부담감을 훌룡하게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자연스러웠으며 영상미도 잡았고 내면 표현도 했으며 마음에 드는 장면이었다.

또한 비행기에서 수트를 만드는 장면은 아이언맨 팬이라면 그리워할 모습이었다.

오마주 장면이 많아서 팬에게는 좋을 영화이다.

 

마블 시리즈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말해주고 있으며 중간에 꾸준히 나오는 유머는 웃음을 짓게 만든다.

스파이더맨 판권 문제 때문인 것 같으나 마블 스파이더맨의 상징성을 확실하게 다른 느낌으로 풀어냈다.

 

 

 

비평

감상평과 이어지는 부분이 많다.

개별 히어로로써 독립하지 못한 후속작에 붉과한 영화이다. 

 마블 영화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해피 호건, 닉 퓨리, 마리아 힐, 아이언맨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마블 시리즈의 팬이 아니라면 이해가 안가니 몰입도 줄어든다. 상당히 불친절하고 무례한 영화이다.

 

 

스파이더맨 1편 홈커밍에서 벌쳐 딸을 좋아하다가 왜 2편에서 갑자기 MJ를 좋아하는지 배경 설명이 부족하다.

젠다야 콜맨과 톰홀랜드의 연기 자체는 좋았으나 갸우뚱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자꾸 초반에 틴에이지 감성이 나와서 나의 취향에는 안맞아기에 힘들었다.

수학여행과 진행되는 스토리 진행이 부산스러워서 집중이 자꾸 틀어지려고 한다.

히어로 액션물 장단에서 자꾸 틴에이지 장단으로 왔다갔다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디스를 어떻게 그렇게 단순하게 넘겨줄 수 있는가 억지 설정에 이해가안된다.

울트론보다 위험해보이는 이디스를 그렇게 쉽게 넘기고 막상 그런 이디스를 받은 빌런이 한다는 것이 영웅놀이이다.

그러나 빌런은 너무 골 때리는 행동이 고도의 기술을 손에 쥐고도 위기감을 못보여준다.

어차피 결국 이길 것을 알지만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이디스는 지구 어디에있는 사람이라도 몇 분안에 죽일 수 있는 무기이다.

힘에대한 책임감을 깨닫는 장면이 부족했고 이디스를 돌려받는 과정도 너무 허술하다.

 

스파이더맨 팬이라면 정말 실망할만한 부분이다.

스파이더맨을 보러왔더니 아이언맨의 뒷 일만 마무리한다.

스파이더맨의 적이 아니라 아이언맨의 적이기에 몰입감도 덜하다.

스파이더맨의 숙명의 적이아니라 아이언맨에게 상처받은 빌런들에 불과하다.

우리의 다정한 이웃 스파이더맨은 어디로 가고 천재와 부자의 유산을 받은 꼬마 히어로만 있나.

영화 마지막에서야 오리지널 도심 거미줄 액션과 불행이 몰려오는 스파이더맨 다운 모습이 나왔다.

 

가루 문제에대해서 너무 쉽게 넘어갔다.

블립현상이라고하고 끝이라니 너무 실망스러웠다.

영화이기에 어느정도는 넘어갈 수 있으나 너무 간단하게 넘어가버렸다.

5년간 사라졌다 돌아온 사람과 남아있던 사람과의 나이 차이는 어떻게 할 것인가.

배우자 사라져서 고통을 이겨내고 재혼한 사람에게 배우자가 돌아오면 어떻게하는가.

사라진 사람의 주식과 재산과 집은 말소 처리되고 소유자가 바뀌었고 돌아온 상황에서 어떻게하는가.

순간 인구가 2배가 되었으니 당장 먹고 마실 식량과 잘 곳과 온갖 사회적 갈등은 어떻게 하는가.

자신의 집, 재산이 사라진 상태에서, 가족은 다른 사람과 살고 있는 상황을 보면 어떤 기분일까.

이런 부분에대한 일말의 설명 없이 블립 현상이었고 우린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끝이다.

 

마블 시리즈가 전체적인 완성도가 높으나 새로움을 더 이상 주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가면 전설적인 명작이 아니라 그저 한 시대의 유행에 불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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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소라니라
나의 기록저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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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감상 : 알라딘

영화 2019. 7. 1. 00:08

영화 알라딘

개봉일 : 19.05.23

관람일 : 19.05.29

상영관 : CGV 광주용봉 2D

 

 


감상평
알라딘 영화 관람은 성공적이었다. 최고의 작품은 아니라도, 애장품에 들어갈만한 영화이다.

이솝우화는 항상 변치않는 교훈을 어른아이들에게 깨우쳐준다.

지니의 램프라는 꿈만같은 물건을 손에 쥔 주인공은 삶의 욕망을 위해 거짓이상(소원)을 갈구하여 거짓만 더해가져간 현실은 다시 더 큰 거짓을 요구한다. 지니의 몸이 연기처럼 이루어진 것은 지니가 이루어주는 꿈마저 연기처럼 헛되이 사라지는 이상에 불과하다는 표현 아닐까.

어떤 이들은 영화를 보고 나에게도 그저 지니가 와서 소원을 들어주길 바라는 어린 아이의 꿈을 꾼다.

지니가 겉모습은 꾸며줄 수 있어도 내면을 바꾸어줄 수 없었다. 거짓은 거짓을 보태고 악순환만 가중된다.

뻔한 이야기의 결말이지만 마지막은 진실과 교훈을 말할 수 밖에 없다.

지니의 해방은 거짓과 도망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지니는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이고 당장 나를 즐겁게 해줄 수 있는 존재이다. 거짓말과 도망도 그렇다.

거짓말하여 위기를 모면하고 그걸로 안될 땐 그저 도망가버리면 당장 현실은 아늑하고 다 잊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인간은 나약하기에 너무나 쉽게 지니에게 의존한다. 인간은 그렇게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 영화의 결말은 당연히 지니로부터의 해방이다. 해방된 것은 지니가 아닌 주인공이다.

 


주인공은 부모도 없는 고아에 도둑질로 삶을 연명하는 사람으로 사회에서도 최약자에 속했다.
그런 주인공에게 지니가 다가와서 달콤한 소원을 들어주었으나 해결되는 것은 없고 점점 더 엉망이 되었다. 주인공은 결국 지니를 해방시키고 현실을 마주함으로써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던 공주와 결혼을했다. 꿈 같던 거짓을 버리고 진실을 마주하고 용기있게 현실을 이겨나가려 노력한다면 이상은 현실이 된다는 교훈을 준다.

공주 또한 자신에게 강제되는 불합리하고 과도한 질서와 전통에 맞서 싸웠다.

그저 입을 다문채 시킨 것만하는 도망자로써의 공주가 아닌 당당히 현실을 마주하며 싸워나가며 자신의 이상을 말했다. 그리고 공주는 자신의 이상 속 백성을 위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술탄이 되었다.

모든 이가 천국이 될 수 있고 지옥이 될 수도 있다. 모든 인간 안에는 천국과 지옥이 공존한다.

어떤 것을 선택하는가는 인간의 의지이다. 강제된 선이 아닌 의지를 지니고 선택한 것이 선일 때 진정한 천국이 아닐까. 온전한 개인(천국)은 강제된 선을 선택한 노예가 아니다. 강요와 세뇌에 의해 선에 종속된 노예가 아니다.

자존하여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모든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선을 선택한 것이 진정한 천국 아닐까. 


선이라 믿은 것이 악일 때도 있고 그 반대인 경우도 있기에 삶 속에서 끊임없이 투쟁하며 선을 찾아가는 것이다.

삶은 힘든 고통의 연속이다. 때론 지니의 소원같은 달콤한 환상이 펼쳐져도 그것은 연기이다.

나는 현실을 마주하고 진실을 말하며 살아가고 싶다.

호평

개인적으로 뮤지컬과 화려한 영상을 좋아한다. 그런 점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그래픽 표현력 또한 최근 개봉했던 피카츄나 개봉 예정인 소닉에 비하면 그래도 만족 할 수 있다.

원작의 교훈적인 내용이 잘들어감과 동시에 영상미도 아름다웠다.

윌 스미스 특유의 재치있는 연기와 배우들의 소소한 유머들이 즐거움을 주었다.

 

비평

영화 초반부에 자스민 공주가 길거리에서 상인의 빵을 마음대로 아이들에게 나누어준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성군이 되고 싶다고 하는 것은 철이 없어보인다.

뭐 영화니까 그렇다치고 넘어가야지..

 

원작과 별차이가 없어서 이미 알라딘의 내용을 아는 이에게 너무 진부하고 식상한 전개이다.

안전하게 흥행하고 싶은 것은 좋지만 이런 우려먹기 식의 영화 상영이 얼마나 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최근 리메이크, 리부트, 실사화 등의 성공작들을 베끼고 우려먹는 영화가 너무 많다. 

 

악역인 자파와 앵무새가 너무 카리스마가 없다. 훌룡한 악역이 주인공을 더 돋보이게 만든다. 알라딘에서 악역은 너무 약해보이고 내면묘사도 부족하고 겉모습만 화려하게 만든 토라진 꼬마 아이같다. 차라리 마지막에 앵무새가 변신하여 아부를 쫒아다니는 장면이 더 악역에 잘어울릴 정도이다.

 

윌 스미스는 노래를 잘하는 배우이나 그 부분을 못살렸다.

남주의 연기가 너무 어색하다. 일부러 평민에서 왕자가 되었을 때의 어색함을 표현할려고 한 것이라면 잘한 것이나 전체적으로 연기가 어색했다.

 


WRITTEN BY
소라니라
나의 기록저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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