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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감상 : 소공녀

영화 2020. 2. 15. 17:22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이란 유행어가 생각났다.
행복마저 점점 소박해지는 가난한 현실은 계속된다.
한 잔의 위스키, 한 갑의 담배와 친한 친구 하나가 삶의 유일한 버팀목이라면 너무 고단한 삶 아닐까.

내 집 하나 마련하기도 힘든 현실에 살아가기 위해서 빚을 만들어야하는 삶이다.

일하기 위해서 대학을 나오고 학자금 대출을 받고 살아가기 위해 집을 사기 위해 월급의 반을 빚을 갚느라 날아간다.
이미 집을 사기위해 빚은 졌고 이것은 마치 노예 계약과 같다.

10년 20년간 월급의 반을 바쳐야 진짜 내 집이되는 사실이 놀랍다.

그것이 그저 영화 한 편이 아니라 수백만명의 현실이라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

모두 그저 살아가고 싶은 것 뿐이다.
누군가는 부모의 그늘마저 없는 삶을 살아가며 온갖 부채를 떠안고 살아간다.

미소는 집만 없었고 다른 이들은 집만 있었다.
물질적 풍요만을 쫒는 세상 속에 우리의 정신적 풍요는 어디서 찾아야할까.

누군가는 세습과 운과 노력에 따른 돈을 가지고 그 흔한 가사노동부터 자신의 일정마저 모든 것을 관리받을 수 있다.

돈으로 안되는 것이 없는 세상에서 집도 가사노동도 자녀 육아부터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살아간다. 누군가는 그것이 없어서 그렇게 태어나고 싶었던 것이 아니였어도 자신의 노동을 팔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연명한다.

자신의 성을 노동을 팔아서 모은 돈으로 겉을 꾸미고 멀쩡한 척하지만 속부터 썩어들어간다.

영화 자체가 다큐멘터리가 아닌 사회 풍자가 목적에 있는 것 같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볼 때에 주인공은 철이 없는 것이 맞다.

안정적인 생활을 하기위해 살아갈 생각은 없고, 술과 담배를 피는 것은 철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고시원은 집이 아닌가. 정말 힘들다면 고시원이란 선택지도 있다.

 

그러나 영화 자체가 현실적으로 다가가기보단 풍자적으로 집에 대해 표현하는 것이기에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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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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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장점이 오히려 단점이 되었다.

뛰어난 기술력을 통해 실사화를 하였고 다큐를 보는듯한 동물들의 모습을 보았다.
정말 놀라운 기술이지만 이 점이 오히려 관객의 마음을 가로막았다.

즐거운 분위기에도 표정의 변화는 적으며, 슬픈 분위기에서도 싸우는 분위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원작 애니메이션과 달리 표정 없는 등장인물들에게 감정 이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물론 노래도 좋고 내용도 정석이지만 담백하여 좋았다.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다.
그러나 다큐에 억지로 더빙한 듯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실사판 라이온킹은 갈피를 못잡은 영화이다.

뮤지컬 영화가 되든가 극화가 되든가 둘 중 하나를 했어야 했다.
Be Prepared는 짧은데다 아무런 임팩트가 없다.

멋진 노래도, 극화도 없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현실적으로 라이언킹을 설명하고자 한다.
혁명가 스카의 몰락을 다룬 영화이다.
사자의 먹잇감들이 와서 심바의 탄생을 기뻐하고 절을 한다.

상식적으로 사자의 인구수 증가 -> 더 많은 먹잇감 필요 -> 더 많이 잡아먹힘 이므로 심바가 태어난 순간 ‘아 쉬펄 x됐네’를 외쳤어야 한다. 착한 사자는 죽은 사자 뿐이다. 노예근성이 따로 없다.
심바는 혈통만 믿고 날뛰는 철부지이다. 반면 머리도 좋고 노력 하지만 혈통에 밀려 왕이 못된 삼촌 스카는 뒷구석에 밀려나있다. 역사적으로도 혈통 믿고 날뛰는 놈들은 그 끝이 안좋았다.

심바가 하는 꼴을 보면 무파사가 자식 교육을 개판쳤구나 라는게 느껴진다. 실제로도 교육이 개판이다. 무파사가 얘기해는 circle of life론. 초식동물을 사자가 먹고 사자가 죽어 풀에 먹히는 순환을 따른다? 영화 내에서 사자가 한 10마리 정도, 사자에게 뜯어먹혀 죽고 풀에 먹히는 초식동물이 압도적으로 많다.

왕정과 신분제를 공고히 하는 세뇌교육인 것이다. 

 

 

스카는 혁명 이념이 있다.

하이에나와의 공존을 꾀한 것이다.

사자들한테 먹이를 털리며 탄압받는 동물.

귀족인 사자들에게 핍박받고 수탈당하는 자들이다.

핍박당하고 수탈당하는 하이에나들과 공존하며 다시는 굶지 않겠다는 이상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


왕위에 오르고 동료들인 하이에나와의 공존을 추구한다.

아니나 다를까 귀족세력이자 적폐들인 사자들 표정이 띠껍다.

역사적으로 왕위를 찬탈하고 나서 왕권 강화를 위해 귀족들을 한번씩 갈아주는게 필요하다.

이방원처럼 다 죽였어야했다.

 

 

 


그동안 심바는 뭘 했냐 하면 티몬과 품바라는 히피들 만나서 벌레나 빨고 앉아 있었다.

이 벌레나 먹던 무능한 심바가 갑자기 자신이 왕이 되겠다며 프라이드 랜드로 돌아온다.
스카의 개혁이 마음에 안들었던 귀족들 입장에서 대립왕이 등장했으니 강력 푸시를 할 수 밖에 없다. 

 

전체적으로 구시대적인 신분제, 왕권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서 마치 스카가 악역처럼 표현이 된다. 

물론 원작이 그러니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정말 시대에 맞게 영화를 본다면 스카는 오히려 영웅이 아닐까.

절대적인 신분제와 왕권이라는 지배질서를 무너뜨린 사자가 아닌가. 물론 본인도 결국 왕의 자리에서 이렇다할 성과를 못내고 몰락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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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니라
나의 기록저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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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의 아이, 일본 특유의 장인 정신이 장면마다 묻어나왔다. 벽과 바닥에 보이는 작은 균열과 빗방울의 모습부터 디테일이 감탄스러웠다. 이렇게 멋진 장면이 연속되어 나오다가 중간 불꽃놀이에서 장면의 품질이 갑자기 3d 건축 모형 느낌이라서 당황스러웠다.

감독은 비청소년에대한 반감이 있는 것 같다. 가출 청소년, 청소년 가장, 사회 소외 계층인 아이들이 주인공이다. 사회는 항상 어떤 판타지적 재난 요소로 불운과 부정에 시달리며 세상을 유지하고 있다. 너의 이름은 영화에서 운석으로 표현됬고 날씨의 아이에선  폭우로 표현되었다.  

 

와동시에 그 모든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몫은 주인공에게 내맡겨진다. 주인공들은 언제나 소외되고 연약한 청소년이다. 고대 문명에서 인간 제물이란 희생을 통해 미래에대한 희망을 그려왔다. 문명마다 제물의 대상이 다르긴 했으나 가장 강인하고 뛰어난 사람이거나 힘이 없는 여자와 아이가 주를 이루었다. 희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책임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회가 만든 문제와 현실을 특정 인물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다. 난폭한 날씨 속에서 위험한 도시, 총기가 떠돌아다니는 도시, 부모가 없이 열심히 일하며 동생을 보살피기 위해 맥도날드부터 사창가까지 갈 현실을 마주한 주인공, 시골에서 꿈과 소망을 찾아서 도쿄에 왔으나 미성년자라는 제약에 일할 곳도 없고 받아주는 곳도 없는 주인공은 월급 3000엔에 일을 한다. 주인공은 그저 잘살길 바랬고 자신의 능력을 통해서 일순간이지만 사람들의 고충을 해결해주었다.

 

매 번 자신의 생명을 깍아서 말이다. 말로에는 모든 생명을 바쳐야 모두가 구원 받는다는 식의 희생이 강요되었다. 책임 없는 자가 책임 지게 생긴 것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말을 믿어주지 않고 계속 통제하려고 든다. 식사, 주거비, 교통비, 통신비를 내주니 3000엔만 주어도 괜찮다는 식이다. 아이의 의사를 묻지않고 반강제로 아동보호소에 보내버리는 식이다.

 

결말부에는 자신이 호다카의 뺨을 때리고 복부에 발길질을 하는 아동학대를 해놓고 경찰이 호다카를 폭행하자 네가 감히? 발끈하며 경찰을 막는다. 아이를 일종의 소유물로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 호다카가 히나에게 이제 날씨의 무녀가 아니라고 소리치는 모습은 마치 네 책임이 아니라고 울부짓는 모습을 연상 받았다.

 

 

 

결말에 이르러서 재난적 요소가 해결될 것이라 예상했으나 틀렸다. 재난의 책임은 현재까지 살아온 어른의 책임이기에 아이에게 희생과 책임을 강요해선 안된다는 감독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예상해본다. 감독은 일본의 근현대사를 부정하는 것 같다.

 

일본의 전체주의 위주의 근현대사는 개인들에게 책임을 강요하고 전체를 위한 희생을 요구했다.

그 과정 속에서 결국 가장 약한 개인들에게 고스란히 가장 많은 희생의 몫이 돌아간다.

목숨으로 책임지고 권리는 보장받지 못하는 암울한 사회이다.

 

다른 나라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아서 더 씁쓸한 영화이다.

책임지지 못하는 사회. 불안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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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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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영화를 보았다. 최근 페미니즘 관련 책을 읽어서일까. 디테일이 보였다. 남아선호사상, 남아는 로봇 장난감, 여아는 분홍색 공주님 옷, 시집이 인생의 목표가 되버린 여자, 임신과 출산의 한계, 제도가 있으나 정착하지 못한 문화, 오빠와 남동생을 위해 희생 당한 여자들의 인생, 미행하는 남고생과 무서웠던 여학생, 그러나 여학생이 웃어주고 헤프다는 네 탓이라는 책임부여.

가부장제란 원래 이런 것이 아니다. 한국의 가부장제는 쓰레기나 다름없다. 미국의 가부장은 적이 농장에 쳐들어오면 가족을 피신시키고 총을 들고 나가서 싸운다면, 한국의 남성은 딸들은 총알받이 시키더라도 본인과 아들은 도망치는 모습이다. 가부장이 더 많은 권력을 소유하는 것은 더 많은 책임과 고생을 떠맡기 때문이다. 그것은 적어도 인간의 도리가 있었다.

한국 사회는 심각했다. 5.18이 큰 상처를 주었듯이 6.25는 더 큰 상처를 주었다. 속도는 빠르고 상처는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채 흉터가 잔뜩 생겨버렸다. 좋은 사람들은 살아남지 못했고 부도덕하고 이기적인 자들이 살아남았다. 그들을 처벌하지도 못했다. 분노와 슬픔이 가득하다.

영화에서 참좋았던 것은 공유를 극단적인 한남충으로 안만들었다는 것이다.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주고 싶어하고, 아내를 위해서 시선을 이기고 육아 휴직을 쓰겠다고하고, 아내가 아픈 것을 알고 전전긍긍하며 자신의 탓인가 슬퍼한다. 배운대로 행동하는 남자인 동시에 본인의 입장에서 나름대로 노력하려는 남자로 연출했다. 이로써 구조적인 문제를 나타낸다.

 

 

임신과 출산에 대한 존중이 부족한 사회, 이런 사회에서 아이를 왜 낳겠는가? 육아 휴직이 있어도 그것에 대한 존중과 배려도 없고 문화가 정착하지 못했다. 이러니 안정된 생활을 위해 공무원으로 인력이 몰린다. 그 상황에서 군가산점을 주려고하니 생존권의 문제가 되버리는 것이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다 떠나서 내가 먹고 살기위해서 상대방을 깍아내려야하는 구조.. 유년기부터 지속적으로 교육된 성 고정관념도 팽배하다. 

 

추상적인 이야기도 아니고, 가상의 인물도 아니고, 용기를 잃고 흑화해버리는 인물도 아니었다. 그들은 꾿꾿히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우리의 이웃이고 가족이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이야기이다. 현실이나 다름없었기에 더 마음이 아팠다. 이 정도 영화도 욕을 먹을 정도라면 얼마나 심적으로 위태로운 상태인가 염려스럽다.

 

현재 20-30대 남성이 가진 것도 없는 상태에서 잘못걸리면 나도 빨간줄 그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은 이해가 된다.

그렇다고 실존하는 문제를 왜곡하고 비난하는 것은 잘못됬다. 동시에 증오로만 가득찬 레디컬 페미니스트도 사라져야한다. 여성 인권 증진이 아니라 시사 정치 피로감만 증발 시키는 그들의 행보는 비난 받아 마땅하다.

영화 리뷰하는 채널들이 리뷰는 하고싶고 패미니즘 지지한다고 욕 먹을까봐 걱정이고 고민인 상황이다.
어떤 채널은 서론에서 페미니즘을 엄청 까내린 뒤에 그래도 영화는 괜찮은 편이었다고 말한다.
어떤 채널은 신중한 단어와 문장으로 자신의 솔직한 평가를 말한다.

문제는 수준 낮은 분노로 가득찬 바보들이 욕만 싸지르고 다닌다. 대화가 아닌 비난과 야유를 퍼부으려는 사람들, 욕할 대상이 필요하고 탓할 대상이 필요한 사람들, 진짜 문제에는 분노할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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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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